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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철학] 장자의 꿈에서 깨고 나면

by seolma 2021.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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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우주
:의미와 무의미

 

 

우주 속의 철학

가장 큰 것은 경계가 없고, 가장 작은 것은 내부가 없다고 했다. 마치 점과 무한을 정의하는 수학의 개념과 비슷하다. 점은 질량도 부피도 없는 것이고, 무한은 수와 양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것이다. 결국은 수학도 철학이다. 물리학자이자 SF 작가인 테드 창의 소설 영으로 나누면에서 천재 수학자 르네는 어느 날 그런 사실을 발견한다. 수학은 우주를 설명하는 언어도, 인간이 발명한 최고의 원칙도 아닌 그저 자가당착일 뿐이라는 사실을. 수학은 인간이 만들어낸 무수한 분야, 종교와 예술과 정치만큼이나 무의미하고, 아무런 근거도 없는 미학일 뿐이었다. 큰 것과 작은 것, 경계가 없는 우주와 내부가 없는 소립자를 정의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이다. 우주와 소립자는 그저 존재한다. 우주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하지만 수많은 과학자는 또한 그렇게 말한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특성이며, 인간은 그 의미 속에서야 산다고. 누구보다 우주의 무의미를 심도 있게 깨닫고 있는 이들임에도, 인간의 의미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 인간에게 우주의 무의미는 무섭도록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장자가 말하는 경지는 우주의 무정함과도 비슷하다. 천지 본연의 모습을 따르고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라. 인간사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말고. 결국은 무의미에 관한 것이다.

 

묘한 사실은 인간은 너무나 근본적으로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다. 마치 어린 아기가 쓴맛과 단맛을 본능적으로 구별하듯, 인간 아기도 세상 모든 것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는다. 유아는 어른보다 민감하게 성적 역할과 차이를 구분한다. 그것은 인간이 진화과정에서 습득한 생존 기전이다. 따라서 무의미는 학습의 영역이다. 쓴 나물이 꼭 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간이 몇십 년에 걸쳐 학습하듯이, 만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습관 역시 오랜 시간이 흘러야만 떨쳐낼 수 있다. 해탈, 통달, 열반, 말은 다양하지만 결국은 그런 것이다. 삶과 함께하는 수양 속에서야 인간은 세상 만물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수양의 방법은 인간마다 제각기 다르다. 가령 대부분 노인이 쓴맛을 즐기게 되는 결과는 같지만, 그들의 삶의 궤적은 모두 다른 것처럼. 누군가는 커피를 즐기는 과정을 통해 결과에 이르고, 누군가는 나물을 즐기는 과정을 통해 결과에 이를 수 있다. 경험은 상대적이다. 세계 역시 상대적이다. 뇌과학자들은 인간은 서로 다른 세상을 보며 산다고 말한다. 우리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이 모두 달라서, 같은 색깔을 보고도 다른 색깔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색의 정형화된 이름을 학습하므로 70억 개의 색을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이렇듯 우리는 보는 세상의 색마저 같지 않은데, 타인의 삶과 내 삶이 같을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 상대적인 세계 속에서 절대적인 결과에 다다른다는 것. 상대적인 세계관에 기초한 절대적 자유. 자유란 무의미를 깨닫고 세상의 의미들에 의존하지 않는 삶이니, 결국 같지 않은 모양의 삶을 살면서도 우리는 동일한 무의미를 깨닫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장자의 말이라고,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삶 속의 철학

상대주의 세계관에 기초한 절대적 자유. 성립할 수 없을 것 같고 번지르르하지 않나 싶은 이 말은 문장으로 존재할 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 문장은 삶을 살아나가며 삶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러나 궁극적인 경지는 절대적으로 같다는 깨달음에 이르러야만 실체화가 된다. 장자가 강조하는 과 같다. 살아보지 않으면 의미를 추측할 수 없다. 관심을 기울여 나 자신의 올바름과 건강함에 집중해야만 불현듯 깨닫는 것이다. 매일 먹는 밥그릇에 얼마만큼의 밥을 채워야 내 속이 더부룩하지 않은지, 몇 시에 자고 몇 시에 일어나야 낮이 활기찬지, 몇 명의 사람과 관계를 맺고 유지해야 사회적으로 건강할 수 있는지. 이것은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학습인 사회화와는 또 다르다. 이것은 되려 그것에 반하는 일이다. 의 목적은 사회적인 의미를 위하지 않는다. 그 의미에 대적하여,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굽히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을 행하는 인간은 오직 자신의 내부에 집중해 가장 자연스러운 정도를 찾는 일이다. 인간 내부의 자연스러움이란, 인류의 기원과 함께 시작되었고 무수한 생존의 경험들로 구축되었으며 진화와 적응의 산물로서 그저 존재한다. 모두에게 있기에 누구나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중용을 따라가는 삶이 옳은가? 옳다는 기준 역시 무의미하다. 장자는 불안정하고 변하기 쉬운 소리에 의존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 예시에는 인간의 말이 있겠다. 장자에 따르면 우리는 자연에 의존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진화해온 과거를 따르라는 말이 아닐까. 부정해봤자 의미 없는 것, 대립해봤자 의미 없는 자연의 존재와 싸우지 말고, 결코 답이 없는 인간사의 논쟁에 삶을 허비하지 말고, 스스로 삶 속에서 얻어낸 중용을 지키며 오로지 자연의 검증을 받는 삶을 살아라. 결국은 인간도 자연이기에, 우리에게 가장 건강한 방법은 우리가 알 수 있다. 중용은 옳은길이 아니다. 중용은 그저 삶의 방향이 건강한지 검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에 불과하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연을 관찰하다 보면 알 수 있다. 균형은 미묘하게, 하지만 동시다발적이고 방대한 원인에 의해 유지된다. 당장 물고기 한 종이 멸종한다고 바다 생태계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 변화로 인해 옳은 것의 기준이 변한다. 그 종의 멸종으로 비워진 해양 생태계의 사슬의 빈자리를 다른 생물들이 채우는 것으로. 자연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일어난다. 조화는 계속되지만, 요소와 구조가 변한다. 무수한 생명체들이 얽혀서 살아가는 지구에는 따라서 진리가 없다. 진리라고 특정할 모든 것은 변해 왔고, 변하고 있고,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지구가 존재하는 거대한 우주. 지구에 진리가 없다면 우주에는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게 되지만, 우주 역시 자연과 마찬가지로, 미묘하고 동시다발적인 요소들로 구성된 계이다. 우주는 태초의 빅뱅에서 탄생한 수많은 원소가 서로 변하고 균형을 이루며 공간을 유지하는 부풀어 오르는 공간일 뿐이다. 아무 의미도 없다. 가령 수소 원자 하나가, 태초에 생겨나 다른 원소가 되지 않고 계속 수소로 존재한 것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혹은 철 원자가 멸망하는 항성의 지대한 압력을 버텨내고 수소에서 철로 변모한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들에 옳다 그르다 하는 인간적인 기준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결국 그런 원소들로 이루어진 생명체인 인간 역시, 자연적으로는 어떤 의미도 없고, 옳음과 그름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상상력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우리의 진화과정에서 사회생활을 하며 발달한 우리의 인지 능력은 기준, 분류, 예지, 상상에 특화되었다. 오지 않을 미래를 두려워하고, 미지의 것에 이름을 붙이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가상의 존재에 이름을 붙여 불확실한 모든 것을 대비하고자 했다. 그렇게 인류와 함께 신이 탄생했고, 왕과 신분과 차별이 생겨났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많은 거짓말과 이야기가 생겼다. 덕분에 인류는 빠르게 발전하여, 현재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가진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한다. 한때는 그것이 정말 가능하리라고 믿었으나, 점차 과학이라는 보다 투명한 유리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며, 우리는 모든 것을 정복하리라는 믿음이 얼마나 헛된지를 깨달아가고 있다.

어쨌거나 아직 두려움은 남아 있다. 인간은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고, 세계의 불안정과 파괴를 두려워한다. 아무리 견고한 벽과 체계도 영원히 안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은 늘 두렵다.

 

장자는 그 모든 두려움을 부정한다. 장자는 인간이 매인 두려움이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라고 보았다. 그 관점에서 벗어나 상상에서 오는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로 향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무의미한 우주에서 수많은 의미를 찾아내는 어려운 일을 해낸 인간이라면, 그 의미가 족쇄임을 깨닫고 부수는 것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와 무의미

장자의 우언 중 혼돈에 관한 것이 있다. 일곱 개의 구멍이 뚫린 인간과 달리 구멍이 없는 혼돈에 선의로 구멍을 뚫자, 혼돈이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이 믿는 의미는 그렇게 인간의 족쇄가 된다. 자신에게 내재한 혼돈이 남들의 것과 같지 않다고 하여 구멍을 뚫는 행위는 의미에 매인 인간이 그릇된 선택을 하는 대표적인 예시이다. 혼돈에 구멍을 뚫는 행위가 그르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간은 유약하여 의미가 없다고 느끼면 쉬이 죽는다. 그러니 어느 정도 성숙할 때까지는 속에 의미를 쌓으며 살아야 한다. 의미를 쌓는 도중에도 자신에게 무엇이 이로운지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주위에 휩쓸리지 않고 진정 자신과 자연에 이로운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의미는 제각기 다른 모양이어야 한다. 우리 삶은 하나도 같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장자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던 것이 그의 철학 세계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누구에게나 순간의 경험이 삶을 가로지르는 의미가 되곤 한다. 그런 개인적이고 논리적이지 않은 경험들이 사람을 이룬다. 결국,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의미들이 쌓여 상대적인 사람이 완성된다. 모든 의미의 덧없음을 깨닫고 벗어나야 하는 것은 다음의 단계이다. 번데기가 차야 날 수 있는 것처럼, 그 정도의 순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경험의 끝에는 결국, 무의미가 있다. 모두에게 같은, 무의미한 자유의 경지가.

 

상대적인 경험들이 모여 단 하나뿐인 인간을 이루고, 그 인간이 마침내 상대적인 세계 속에서 세계의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절대적인 자유를 되찾는다는 것. 두려움도, 인간사의 많은 근심과 감정도 없는 무위의 세계. 그것이 장자가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 세상이라면, 사실 모든 인간이 바라는 천국의 모습이다. 장자가 고뇌하여 글을 쓴 이유도 지나친 의미에 매몰된 사람들이 무의미라는 천국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서가 아닐까. 장자의 꿈에서, 나비가 된 장자가 경험했던 무위의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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