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몰지구
전윤호
자꾸 네게 흐르는 마음을 깨닫고
서둘러 댐을 쌓았다
툭하면 담을 넘는 만용으로
피해주기 싫었다
막힌 난 수몰지구다
불기 없는 아궁이엔 물고기가 드나들고
젖은 책들은 수초가 된다
나는 그냥 오석처럼 가라앉아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나기 내리고
흘러 넘치는 미련을 이기지 못 해
수문을 연다
콸콸 쏟아지는 물살에 수차가 돌고
나는 충전된다
인내심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를
꽃 피는 너의 마당이
잠기지 않기를
전화기를 끄고 숨을 참는다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
*수몰지구 : 사방이 물로 갇힌 구역
세상의 빛깔
서덕준
모든 빛은 전부 네게로 향하고
꽃가루와 온갖 물방울들은 너를 위해서 계절을 연주하곤 해
모든 비와 강물은 너에게 흐르고 구름이 되고
다시금 나를 적시는 비로 내려와
모든 꽃잎과 들풀, 그리고 은빛과 금빛의 오로라는
세상이 너를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빛깔이야
밤이면 네가 하늘을 잔뜩 수놓는 바람에 나는 아득하여
정신을 읽곤 하지
아,
세상에 너는 참 많기도 하다
소실
황인찬
해변에 가득한 여름과 거리에 가득한 여름과 현관에 가득한 여름과 숲속에 가득한 여름과
교정에 가득한 여름 물 위에 앉은 여름과 테이블 맞은편의 여름과 나무에 매달린 여름과
손 내밀어 잡히는 여름 잡히는 않는 여름
눈을 뜨니
여름이 다 지나 있었다
창가에 걸어놓은 교복은 빠르게 말라 가고
또 보다 많은 것들이 수채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래도록 그것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이 손을 언제 놓아야 할까
그 생각만 하면서
먼 여름
이성호
아무리 채찍질해도 닿을 수 없는
벼랑처럼 아스라한 그대여
내 마음에 무수히 살면서도
도무지 삶이 되지 않는
어떤 꽃처럼
먹먹한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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