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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책/시 모음집

[울적한 사랑 시 모음]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것 뿐.

by seolma 2020.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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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덕준

맑은 하늘이 서서히
잿빛 구름으로 멍드는 걸 보니
그는 마음이 울적해진다고 했다

하늘은 흐리다가도 개면 그만이건만
온통 너로 멍든 내 하늘은
울적하단 말로 표현이 되려나

 

 

언제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가 닿지도 와 닿지도 않는 사랑은 형체가 없는 안개처럼 희부연 색감과도 같다. 날이 갈수록 짙어지는 그 색은 진해지면 진해질수록 정체를 알 수 없어졌다. 왜 너를 사랑하는 걸까.  닿아주지도 잡혀주지도 않는 사람인데. 
그렇게 멍이 들었다. 흐려지다 결국 사라지는 듯 해도 어쩌면 영원히 내게 남아 있을 멍이.

 

 

 

 

 

아까시, 과일, 별의 줄무늬

                                       김소형

울타리가 있어요. 푸른 저택과 아까시나무, 낮은 십자가를 감싸는
까마득한 구름을 보는 맹인이 살고 떨어진 과일을 주워먹는 아이들,
장작으로 만든 피아노를 치는 소년이 뛰어다녀요
저곳에서 당신을 위한 맹인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어 같이 게임을 해도 좋겠죠
별의 줄무늬와 지붕 한 칸, 그것을 나누거나 
발목을 태워도 아무도 모를 거예요.
우울과 광기를 자랑으로 여기고
기꺼이 뛰어내릴 수 있는 그들을 
사랑하게 된 건 오래 전 이야기.

푸른 저택, 아까시나무, 그곳에서 미끄러지는 상상을 해요.
다침 없이, 손엔 흰 반점이 마치 떨어진 아까시 꽃처럼 번져 가고

울타리에 매달려 울고 있는 내게 
당신은 언제든 뛰어내려도 좋다고 말해요.
마치 영원히 받아 줄 것처럼.
영혼이 있다면 받아 줄 것처럼.

그 말이 있는 한 나는 여기 카페에 앉아서도 보란듯이
눈과 혀를 흘리며
마구 떨어질 수 있어요

 

올곧이 기댈 하나의 믿음이 되어 주는 사람, 그런 사랑. 우울한 광기를 품고 우리는 언제든 뛰어내릴 수 있지만, 사실 뛰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는 것. 그리고 당신은 말한다, 영원히 받아줄 것처럼. 영원히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면 영원할 수라도 없을까. 행복하지 않아도 너와 함께 하는 영원이면 족한데. 

 

 

 

 

 

 

오르골 여인 

                        김지녀

태엽을 감아요 어떤 예감처럼 팽팽한 느낌이 나쁘지 않죠 누군가 벽을 타고 오르고 있어요 그리다만 벽화 같아요 내 얼굴은 밟고 지나간 발자국 같아요

부풀어 오르는 나무들 몸속으로 수혈되는 그늘 조금씩 깊어지는 눈 그늘 그 속에 고여 있는 떨림 울림 당신과 나는 바람이 가득한 상자랍니다

당신의 소리는 날마다 아름답군요 스스로 돌고 있는 지구에서 나는 중심을 잃어요 한 발로 디딘 세계는 어지러워요 오른손 왼손을 번갈아 가며 땅의 흔들림을 짚어 보고 일 년이 지나도

나는 가벼운 뻐를 움직여 오래 걸었어요 밤 깊은 곳으로 달아나는 달과 숲의 함성을 기억해요 나는 당신과 밤의 태엽을 감고 있어요

 

지구가 돈다는 게 느껴져? 그 사실은 마치 오래되어 죽어버린 진리처럼 오묘하다. 그 오묘한 진실이 너의 곁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분명한 확신이 된다. 네가 그만큼 아득하고 어려운 진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언젠가 너와 나를 완전히 분리해낼 수 있을까. 하나가 아님에도 나는 자꾸 너를 내 안에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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