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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추천5

[여자들의 왕-정보라] 그동안 배제되었던 캐릭터들이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 남았음을 제목을 보고 심장이 두근대는 것이 아니라 인상이 찌푸려지는 분들께, 아마 당신은 생물학적 남성일 가능성이 높겠고, 한 가지를 묻고 싶다. 혹시 일에는 무엇보다 효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길게 늘어진 맛집 줄, 운전 실력이 미숙해 우왕좌왕하는 도로 위의 초보 운전자, 떠드느라 일처리가 늦어지는 동사무소(주민센터의 과거 이름) 직원들을 보면서 화가 나는 편이신지. 그렇다면 효율을 중요시 여길 가능성이 높은데, 어째서 비효율의 극치인 편견과 혐오의 감정에는 그토록 관대한 건지. 나는 그게 되게 우습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제목과 달리 이 책은 사회과학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 이 책은 굉장히 순수한 재미로 가득찬 소설집이다. 그리고 치열한 생존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 재.. 2022. 12. 2.
[스노볼 드라이브-조예은] 지지부진하고 느리게 멸망하는 오늘의 세상에게 같은 작가의 단편집 https://in-mybookshelf.tistory.com/130 [트로피컬 나이트-조예은] 싱싱한 책 한 권 베어물기 이토록 촌스러운 제목과 이토록 미적인 표지. 둘 중 하나라도 모자랐다면 집어들지 않았을, 소설이라기보다는 다이소에서 파는 레트로 PVC 다이어리 같은 외관의 책이었다. 책에 싸구려라는 말 in-mybookshelf.tistory.com 동일한 작가의 단편집, '트로피컬 나이트'가 내게 실망을 안겨줬다면, 장편인 '스노볼 드라이브'는 또다시 기대를 하게 될 만큼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그다지 어렵지는 않지만 충분히 참신하고 흥미로운 소재, '녹지 않는 눈'으로 꽤나 재미있는 전개를 해 냈다. 누군가 지구를 통채로 박제해버릴 심산인 듯 했다. -스노볼 드라이브, 36p.. 2022. 10. 14.
[시선으로부터-정세랑] 죽지 않았으니까 사는 것처럼 살아야지. 이 책을 아주 오래 보아오면서, 문득문득 보일 때마다, 다각으로 나뉘어진 푸른 원색과 프리즘의 오색빛같은 배경색과 시선이라는 제목에서, 이 책에서 말하는 시선이 무엇이길래 이리도 예쁘고 고운 빛을 낼까, 궁금했었다. 근 일 년 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며 이곳저곳에서 책 제목을 마주할 때마다 '시선으로부터,'라니, 참 예쁜 말이다, 어떤 시각적 심상을 담은 책일까 생각했다. 시선이 사람 이름일 줄은 몰랐다. 정말로. 지난 세기 여성들의 마음엔 절벽의 풍경이 하나씩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최근에 더욱 하게 되었다. 십 년 전 세상을 뜬 할머니를 깨워, 날마다의 모멸감을 어떻게 견뎠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떻게 가슴이 터져 죽지 않고 일흔아홉까지 살 수 있었느냐고.(책 15장) "...한 사람에게 모든 .. 2022. 10. 3.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김초엽] 이해하여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여 이해하는 것 이 블로그의 첫 글이 이 단편집 중 제목에 해당하는 작품만을 읽고 쓴 글이었다면, 이번에는 단편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이야기들을 해보려고 한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재미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책이 나온 역순으로, 를 읽고 김초엽 작가의 데뷔작인 을 읽은 후, 오히려 두 단편집이 가지고 있는 중심 주제와 감동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가 이해와 사랑에 관한 책이라면, 은 다름과 융화에 관한 책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등장하는 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전자가 개인적, 사적인 이해였다면, 후자인 이 책은 사회적 이해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해하지 않는 것들이 아니라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어져버린 것들과 마주한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2022. 3. 31.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읽어본 책 중 가장 슬픈 책 이름이 없는 아이가 있다. 보통 이름이란 부모가 가장 정성 들여 짓는 것이다. 남들 다 있는 흔한 이름조차 제대로 없는 아이는 자신에게 사랑은커녕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를 가짜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열한 살짜리 아이는 가시가 돋치기 시작한다. 이 책은 이름이 없는 이 소녀가 홀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소녀는 늘 직설적이고 거침이 없지만, 솔직하진 못하다.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그대로 직면했다가는 세상이 너무 원망스러워 혼자 죽어버릴까봐. 사랑받기만 해도 모자랄 시간들을 그냥 홀로 커버린 아이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일을 겪지만, 정작 단 한 번도 자신의 부모가 될 만한 사람은 찾지 못한다. 이 소녀만큼이나 책은 뾰족뾰족하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그 크고작은 가시에 .. 2021. 3.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