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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책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별에 SF를 더하면

by seolma 2020.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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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기 때문에

am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_김초엽

  서점에서, 혹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고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책을 집어드는데는 늘 나름의 이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혹은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는 작가라서, 서평이 마음에 들어서. 책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사실 나는 매번 다른 이유로 책을 고른다.

  이번의 이유는 책 표지였다. 사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겠지만, 이 책은 예쁘다. 마치 한 장의 고운 사진처럼. 보랏빛으로 쓰인 은유적인 제목 때문에 더욱 그렇다. 책을 열어보기 전에는, 나는 이 책이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사랑과 이별을 그린 서정적인 소설일 줄 알았다. 

 

 

  이 소설은 여러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단편들을 아우르는 주제는 미래와 이별이다. 2020년의 지구가 아니라, 조금 시간이 흐른 후의 지구. 그리고 김초엽 작가는 근미래의 지구에서 진보한 기술이나 사회가 아니라, 이별을 이야기한다. 웜홀을 통과하는 우주선도, 생전의 기억을 고스란히 저장할 수 있는 기술도 어쩔 수 없는 이별을.

 

(단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원치 않으시면 주의해주세요)


 

  네 번째 단편이자 이 단편집의 제목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나오는 노인은 이미 운행이 끝난 우주선을 타기 위해 허물어진 정거장에 있다. 수십 년 전, 가족들이 있는 행성으로 갈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린 그 날을 몇 번이고 떠올리면서. 정거장을 철거하기 위해 노인을 설득하러 온 청년에게 노인 안나는 자신이 이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과학자였던 안나는 오랫동안 연구해오던 냉동 수면 기술의 완성을 위해 가족들을 먼저 다른 행성으로 보냈다. 하지만 워프 항법보다 더 효율적인, 웜홀을 이용한 항법이 개발되자, 안나의 가족이 있는 행성으로 가는 비행편을 더 이상 운행할 이유가 없었고, 그 마지막 비행을 안나는 자신의 냉동수면기술의 연구로 인해 놓치고 만다. 그날의 후회로 수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의 기술로 몇 번이고 수면에 들었다 깨는 것을 반복하며, 안나는 조그만 정거장에서 다시 우주선이 운행할 날만을 기다려 온 것이다. 반복되는 냉동수면으로 뇌세포가 조금씩 손상되는 것을 느끼면서도. 끈질기게.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영영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사랑하는 이를 보내는 일은 인류의 역사에서 무구히 반복되어 왔다. 전쟁터에 가족을 보내는 일이 그러했고, 개인이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먼 나라로 이주해야 하는 순간이 그랬다. 비행기 같은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 나라와 나라의 거리는 이 소설 속 지구와 슬렌포니아 행성 만큼이나 멀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르고 많은 기술이 발명되고 인류가 먼 우주의 새로운 행성에 도달한다고 할지라도, 사람이 극복하지 못하는 거리는 늘 존재한다. 그것은 어쩌면, 기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기술의 발전으로 되려 더 멀어지고야 만 거리,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문제를 넘어서, 한 인간에게 주어진 수명을 늘리고도 도착할 수 없을 만큼 아득히 먼 거리. 안나의 말처럼, 우주로 쏘아올린 비행선들과 수많은 행성으로 이주한 수많은 사람들은, 결국 '우주의 외로움의 총합'만을 늘린 것이 아닌가. 

 

 

  멀디 먼 슬렌포니아 행성을 한 개인이 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아는 청년은 안나를 계속해서 설득한다. 하지만 안나는 마침내, 조그마한 우주선 하나를 타고 정거장을 빠져나간다. 반복된 냉동수면으로 뇌세포가 사멸해 이제는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조차 가물거린다는 노인은 자신이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 가족들이 있는 곳, 지구에서 아득히 먼, 행성 슬렌포니아로. 털털거리는 고장난 우주선을 타고. 

 

그녀는 언젠가 정말로 슬렌포니아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끝에.

 

    때로는 가야만 할 때가 있다.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아니 그것과는 무관하게, 꼭 가야만 할 때가 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의 속도로 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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