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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랜드-천선란] 이름 부르고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것이 이해고 사랑이라고 [천 개의 파랑]이라는 제목은 종종 들어봤지만 천선란의 책을 '읽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장편을 기대하고 펼쳤으나, 요즈음의 책들이 종종 그렇듯 소설집이라는 이름이 붙은 단편집이었다. 소설집이라고 불리려면 적어도 하나의 세계관을 가지고 가야하지 않냐고, 조금 투덜거리면서 두 번째 이야기를, 세 번째, 네 번째 이야기를 읽었다. 방금 천선란을 쳐보고 기억이 났다. 사실은 [랑과 나의 사막]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름 때문인지, 나는 천선란을 늘 꽤 어른인 작가로 여기고 있었다. 생각보다 젊다는 사실에 놀랐고, 어리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던 글솜씨에 놀랐다. 노랜드는 SF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편하게 읽을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그러나 한국 작가들의 SF가 가끔 그렇듯, 어떤 것들은 아예 과학을 포기해버리기.. 2024. 4. 21.
한강의 채식주의자 해석 [채식주의자-한강] 재미있어서 술술 읽히는 책이 오랜만이라서 기뻤다. 내용이 가볍지 않은데도 모든 감정과 상황이 이해가 너무 쉽게 가서 읽기가 편했다. 디 아워스라든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든가 82년생 공지영에서 이미 접한, 결혼 생활을 하는 여성의 본질적 우울에 대한 장편 서사. 필연적인 을이 될 수 밖에 없는 평생에 자신이 기어들어왔고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뛰어난 직관력으로 인지해버린 여자들의 불행. 그들은 때때로 '미쳐' 버리고, (남성적) 세상이 이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 삶을 벗어나기를 택한다. 주머니에 돌을 넣고 강으로 걸어들어가고, 식사를 거부하며 말라 죽는다. 이런 작품들은 이제 너무나도 당연하게 문학의 일부로 출간된다. 그러나 여전히 욕을 먹고, 여전히 작가들을 더 큰 고뇌에 빠뜨린다. 원치 않.. 2023. 12. 29.
[이토록 평범한 미래-김연수] '미래'를 '기억'하라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두려움의 근원을 생각해보자. 결과를 알 수 없는 면접,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불확실함,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결과들.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고, 과거의 그늘에 매여 앞으로 나아갈 수 없도록 만드는 것들. 불안과 두려움에 지치고 생을 살아갈 힘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23년이 되기 전 겨울 한국 소설 중 가장 핫했던 책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 제목만 보고서는 SF인줄 알았지만, 사실 이 책은 절망 이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 있었던 다양한 단절과 패배들에 대해 작가가 제시하는 따뜻한 사랑의 관점은 충분히 위로가 될 만하다. 예측불가능하고 불안정한 미래의 특성으로 인.. 2023. 7. 23.
당신은 한번도 당신을 벗어난 적이 없군요 [구름/무위/햇볕/위로 시 모음] 무위 : 아무 것도 되지 못 하거나 이루지 못 함. 무위한 삶에 대하여. 구름의 망명지 이대흠 고향을 적을 수 있다면 당신은 구름의 망명지로 갈 수가 없습니다 구름의 거처에는 주소지가 없으니까요 구름에겐 이력서도 없습니다 기록하는 것은 구름의 일이 아닙니다 구름은 언제든 자기로부터 벗어납니다 당신은 한번도 당신을 벗어난 적이 없군요 구름이 되려면 머무르지 마십시오 아무리 아픈 곳,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도 지나쳐야 합니다 뜨거움과 차가움도 당신의 이름이 아닙니다 여기가 아니라 저기가 집입니다 주어가 사라진 문장처럼 가벼워져야 합니다 있다와 하다의 사이를 지나 구름의 망명지로 갑시다 죽은 별이 자신의 궤도를 내려놓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당신의 안전이 당신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공기처럼 당신은 당신을 벗을.. 2023. 6. 14.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사랑 시 모음] 제목-황학주 시집 중 https://in-mybookshelf.tistory.com/26 [삶/사랑 관련 시 모음] 사랑하며 사노라면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 in-mybookshelf.tistory.com 심야식당 / 박소란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이 싱거운 궁금증이 오랫동안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 충무로 진양상가 뒤편 국수를 잘 하는 집이 한 군데 있었는데 우리는 약속도 없이 자주 왁자한 문 앞에 줄을 서곤 했는데 그곳 작다란 입간판을 떠올리자니 더운 침이 도네요 아직 거기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맛은 그대로인지 .. 2023. 4. 24.
무엇인지 무엇이었는지 무엇일 수 있는지-최유수 어떤 밤 최유수 잠에 들기 위해 누워서 눈을 감고 있다보면, 나는 결국 완전히 혼자이고 덩그러니 고립된 존재라는 느낌이 엄습할 때가 있다.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듯 보이지만 실은 그 누구와도 영영 연결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감. 서로의 주위에 머무르며 꾸준히 온기를 나누어 주는 사람들이 있음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인 단절감이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처럼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어차피 그들도 모두 나처럼 고립된 존재일 뿐이므로, 감정이 오직 본인의 소유인 한 우리는 완전히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 느낌이 유독 강렬한 밤이 있다. 내 안의 고독이 나를 문초하는 밤. 어떤 위로로도 상쇄시킬 수 없는 타성의 시간. 고요한 밤의 산맥 어딘가에서, 다가올 새벽을 기다린다. 단어들 최유수 사랑.. 2023. 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