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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룰루 밀러] 포기하지 않음의 경이로움, 살아냄의 아름다움

by seolma 2022.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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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룰루 밀러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인상깊은 책.

  남녀노소 국적을 불문하고 추천하고 싶은 책.

  꼭 읽어보라고 쓰는 글이긴 하나 실은 스포일러 없이 그냥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 안에는 역사가 있고, 현실에 굳건히 발붙이고 선 과학이 있고, 한 사람의 인생이 있고, 반전과, 감동이 있다. 장르를 특정하는 것이 무의미할 만한 책이다. 그동안 수많은 책들을 읽으며 이 책을 기다려 왔음을 깨닫게 되는 책.

 

 

혼돈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이라는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나는가'하는 시기의 문제다.(15)

 

  책은 혼돈에서 시작한다. 가령 한 인간이 평생을 바쳐 쌓아온 질서가 자연재해 한 번에 전부 무너지는 순간 같은 것. 아무리 발버둥쳐도 혼돈에서 벗어날 수 없고, 아무리 견고한 성을 쌓아도 무너지지 않을 순 없다. 물리의 가장 기본인 열역학 법칙 중 제 2법칙에는 이런 것이 있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은 일정한 구조와 가치로 시작해서 무질서한 혼돈과 낭비의 상태로 나아가며, 이 방향을 거꾸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책을 쓴 저자는 그러한 혼돈 앞에서 무기력해져 있다. 7살 때, 아버지가 들려준 무의미는 마치 인생에 있는 수렁 같았다.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고, 부정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너는 중요하지 않아.' 글쓴이는 그 말에 평생을 매인 듯 했다. 

  룰루 밀러에게 내재된 우울은 아버지의 가르침과 유년기의 불행함을 만나 강화되었다. 그 우울은 삶의 순간순간마다 글쓴이를 붙잡고 죽음의 문턱으로 끌어내린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삶을 살아내려 하는 그녀의 노력 그 자체가 나는 정말이지 경이로웠다. 슬픔과 고통을 견뎌내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아름다워 보인다.

  그렇게 느꼈을 때 쯤에 나는 이 책을 사랑하게 되었다. 

 

 

 

  마치 우주 속의 수많은 먼지처럼, 아무도 보지 않는 별과 같은 존재가 된 기분. 유일한 위로가 되던 연인과의 관계는 스스로의 실수로 망가뜨렸다. 존재가 무의미하다는 우울과 영영 회생할 수 없다는 절망과 그것이 자기 탓이라는 죄책감 속에서도 글쓴이는 살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혼돈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스스로의 삶을 쌓아 올려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과학자의 삶을 샅샅이 파헤쳐보기 시작했다. 그 과학자라면 인생에 대한 어떤 해답을 찾아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데이비드는 당시 밝혀진 어류 12,000~13,000종 가운데 2,500종 이상을 구분해 이름지은 집요하고 천재적인 과학자였다. 그는 그 물고기들의 학명과 연결고리를 짓고 밝혀냈으며, 생명의 위대한 사다리를 세우고 그것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그의 인생에 들이닥친 수많은 역경들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수년간 모은 수만 개의 표본들이 어느 날의 지진에 무너져 온 바닥에 에탄올에 퉁퉁 불린 물고기들이 쏟아져 내리는 순간에도, 그는 호스를 켜고 표본에 물을 뿌렸다. 그리고는 바늘을 집어들고 물고기의 표피에 이름표를 꿰메어 붙였다. 다시는 그 이름을 잃지 못하도록, 어떤 혼돈이 찾아올지라도. 저자인 룰루 밀러는 그런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에서 자신의 삶의 절망을 극복할 어떤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그런 주인공이 발견한 것은,

 

 

이후로는 책을 읽으신 분들만 읽기를 바랍니다. 스포당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고 할 지라도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으며 스스로의 답을 찾아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물론 여러분이 화면을 내리는 것 까지 막지는 못하겠지만요.

 

 

 


 

 

모든 자(ruler) 뒤에는 지배자(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268)

 

 

  거대한 오만. 너무도 깊고 굳건히 뿌리박혀 있어서, 그의 인생은 물론이고 오만의 팔이 닿는 모든 이들의 인생을 재단하고 난도질하고 그러면서도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는 오만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방해하던 대학의 총장을 자살로 위장시켜 살해했다. 또한 '우생학' 이론의 맹렬한 신봉자였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그의 믿음과 오만으로 수만 명의 여성에게 불임 수술을 시켰고, 그들에게 '비적격' 판정을 내리고 평생을 수용소에서 살게 했다. 학살하지 않은 자비를 베풀었다 여기며.

  비적격 판정을 받은 그들은 노숙자, 장애인, 범죄자, 히스패닉, 동양인,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성들이었다. 끌려가 답이 정해진 재판을 받은 후, 불임 수술을 명령받았다. 비적격하여 후손을 낳게 해서는 안 된다는 판정이 내려졌으므로. 

 

  그는 틀렸다. 우생학은 현재는 모든 과학자들이 비웃는 이론이다. 충치 박멸을 위해 입 안의 모든 세균을 죽여버린다고 생각해보자. 유익균이 사라진 사람은 얼마 못 가 죽을 것이다. 자연이 가진 다양성과 무수히 많은 돌연변이들은 그 자체로 대비책이며, 생존이며, 진화이기 때문이다. 짧은 우리의 식견으로 그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의해 불임이 된 한 여자를 만나며,  룰루 밀러는 진정 자신이 찾아 헤맸던 해답을 발견하게 된다. 애나라는 그 여성은 수용소에서 만난 또 다른 이와 함께 살며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애나는 일평생 좋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그것이 한 순간의 재판 이후로 물거품이 되고도 애나는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남은 가능성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바다에 너울거리는 오묘한 빛깔의 그물

 

 

 

천천히 그것이 초점 속으로 들어왔다.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이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다정하게 흔들어주는 손, 연필로 그린 스케치, 나일론 실에 꿴 플라스틱 구슬들-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그물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 (226)

 

 

  룰루 밀러는 민들레를 떠올린다. 누군가의 밭에서는 쓸모없는 잡초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약초가 되는 작은 식물을. 우생학자들이 미처 보지 못하고 뽑아버리는 민들레들이, 어디론가 가서는 누군가를 살리는 중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저자는 그제야,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 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227)

 

바다에서 나사 모양으로 회전하는 물고기

 

  그리고 그의 사후에 어떠한 진실들이 밝혀지든,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듯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그의 업적들은, 룰루 밀러와 책을 읽는 우리들에게는 어떠한 분노를 불러 일으킨다. 그가 망친 인생들에 비해 그가 너무 평온하게 살다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원초적인 선과 악에 대한 불평 말이다. 

  그러나 한국계 한 여성 과학자가 밝혀낸 어떤 사실로 인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그가 이룩해놓은 모든 것들을 단숨에 부정당하게 된다. 그건, 바로, 

 

왜냐하면 우리의 바닥 모를 혼란한 세계는 소매 속에 또 하나의 속임수를 감춰두고 있었기 떄문이다. 데이비드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에게 가장 소중한 그것을 훔쳐갈 마지막 하나 남은 방법을. ... 자연은 그가 자기 손으로 직접 그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 (235)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의 비밀이 드디어 여기서 밝혀진다.)


  생물의 분류 범주로서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빨간 점이 있는 모든 생물이 한 종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한평생을 쏟아 세운 질서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믿었던 모든 '진실'은 잘 포장된 거짓이었다. 허황된 세계 속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위해 노력하고 믿으며 타인의 인생을 잡아먹던 한 인물은 그렇게 무의미의 파도에 쓸려 사라졌다.

  그렇게 글쓴이는(그리고 우리 역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권선징악'과도 같은 결말에 만족한다. 동양계 여성 과학자의 발견이 우생학 신봉자의 인생을 부정하는 것은 룰루 밀러는 고상하게도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내게는 꽤나 코미디처럼 느껴졌다. 


  룰루 밀러는 책의 마지막 챕터에서 그녀가 얻은 새로운 삶, 새로운 의미와 중요한 사람들을 설명하며 이야기를 마친다. 

 

  평화롭고, 완벽하게. 

 

 

 

  표지부터 아름답게 울리며 마음을 사로잡았던 책은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전개와 눈부신 일러스트레이트들로 쉴 틈 없이 우리의 혼을 쏙 빼놓는다. 후반부로 가면 모든 문장에 밑줄을 쳐야 할 정도로 빛나는 글들이 페이지에서 흐르고, 정신없이 문장들을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울고, 화내고, 웃으며 저자의 결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책이 끝나면, 이전처럼, 그러나 이전과 확실히 다르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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