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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책34

[노랜드-천선란] 이름 부르고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것이 이해고 사랑이라고 [천 개의 파랑]이라는 제목은 종종 들어봤지만 천선란의 책을 '읽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장편을 기대하고 펼쳤으나, 요즈음의 책들이 종종 그렇듯 소설집이라는 이름이 붙은 단편집이었다. 소설집이라고 불리려면 적어도 하나의 세계관을 가지고 가야하지 않냐고, 조금 투덜거리면서 두 번째 이야기를, 세 번째, 네 번째 이야기를 읽었다. 방금 천선란을 쳐보고 기억이 났다. 사실은 [랑과 나의 사막]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름 때문인지, 나는 천선란을 늘 꽤 어른인 작가로 여기고 있었다. 생각보다 젊다는 사실에 놀랐고, 어리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던 글솜씨에 놀랐다. 노랜드는 SF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편하게 읽을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그러나 한국 작가들의 SF가 가끔 그렇듯, 어떤 것들은 아예 과학을 포기해버리기.. 2024. 4. 21.
한강의 채식주의자 해석 [채식주의자-한강] 재미있어서 술술 읽히는 책이 오랜만이라서 기뻤다. 내용이 가볍지 않은데도 모든 감정과 상황이 이해가 너무 쉽게 가서 읽기가 편했다. 디 아워스라든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든가 82년생 공지영에서 이미 접한, 결혼 생활을 하는 여성의 본질적 우울에 대한 장편 서사. 필연적인 을이 될 수 밖에 없는 평생에 자신이 기어들어왔고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뛰어난 직관력으로 인지해버린 여자들의 불행. 그들은 때때로 '미쳐' 버리고, (남성적) 세상이 이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 삶을 벗어나기를 택한다. 주머니에 돌을 넣고 강으로 걸어들어가고, 식사를 거부하며 말라 죽는다. 이런 작품들은 이제 너무나도 당연하게 문학의 일부로 출간된다. 그러나 여전히 욕을 먹고, 여전히 작가들을 더 큰 고뇌에 빠뜨린다. 원치 않.. 2023. 12. 29.
[이토록 평범한 미래-김연수] '미래'를 '기억'하라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두려움의 근원을 생각해보자. 결과를 알 수 없는 면접,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불확실함,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결과들.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고, 과거의 그늘에 매여 앞으로 나아갈 수 없도록 만드는 것들. 불안과 두려움에 지치고 생을 살아갈 힘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23년이 되기 전 겨울 한국 소설 중 가장 핫했던 책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 제목만 보고서는 SF인줄 알았지만, 사실 이 책은 절망 이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 있었던 다양한 단절과 패배들에 대해 작가가 제시하는 따뜻한 사랑의 관점은 충분히 위로가 될 만하다. 예측불가능하고 불안정한 미래의 특성으로 인.. 2023. 7. 23.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임소연] 가치와 실제가 뒤섞인 현실에서 제대로 '보는 법' 민음사 탐구 시리즈 중 네 번째 책인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은 과학기술학자인 저자가 저술한 책이다. 이 책은 페미니즘적인 시선으로 현대 과학기술과 그것이 내재한 허점을 분석한다. 진화론부터 인공지능까지, 현대 과학의 총체를 다루는 이 책을 따라 읽어가며, 우리는 새로운 시선으로 오늘날의 과학을 본다. 과학이라는 신비 '신비'라는 것이 허울 좋은 모양새를 하고는 많은 이들의 눈을 가리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무지와 방관 그 이상이 아닌 단어라는 것을 이 책은 이 한 권 동안 설명한다. 특히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이라고 믿어지는 과학이라는 것이 연구자의 눈과 손을 거쳐 얼마나 왜곡되는지, 그렇게 탄생한 우리 시대의 '과학'이 어떻게 가치와 주관과 뒤섞이는지를. 과학연구가 사회적 가치와 무관하게 수행될 수 없다.. 2023. 1. 26.
[여자들의 왕-정보라] 그동안 배제되었던 캐릭터들이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 남았음을 제목을 보고 심장이 두근대는 것이 아니라 인상이 찌푸려지는 분들께, 아마 당신은 생물학적 남성일 가능성이 높겠고, 한 가지를 묻고 싶다. 혹시 일에는 무엇보다 효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길게 늘어진 맛집 줄, 운전 실력이 미숙해 우왕좌왕하는 도로 위의 초보 운전자, 떠드느라 일처리가 늦어지는 동사무소(주민센터의 과거 이름) 직원들을 보면서 화가 나는 편이신지. 그렇다면 효율을 중요시 여길 가능성이 높은데, 어째서 비효율의 극치인 편견과 혐오의 감정에는 그토록 관대한 건지. 나는 그게 되게 우습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제목과 달리 이 책은 사회과학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 이 책은 굉장히 순수한 재미로 가득찬 소설집이다. 그리고 치열한 생존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 재.. 2022. 12. 2.
[여행의 이유-김영하] 잘 '여행'하는 방법 여행의 이유 길었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내가 가장 먼저 결심한 것은 여행의 이유를 읽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유명한 책과 유명한 작가라 제목도 이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읽어야 할 어떤 이유나 계기가 없이 그저 시간이 흐르다가, 제대로 된 '나의 여행'을 마치자 문득 떠오른 것이다. 그런 책이 있었더라, 하고. 이 책에는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여행을 개척해 본 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인생도 지구에서 우리가 벌이는 한 바탕의 여행이라는 은유에 빗대어 생각해보았을 때, 여행을 해 보지 않은 이도 그 내용들에 공감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가 지구별 여행자가 아닌가. 환대의 순환 우리가 이 낯선 행성에서 최초로 세상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아주 여리고, 유약.. 2022. 1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