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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책

[노랜드-천선란] 이름 부르고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것이 이해고 사랑이라고

by seolma 2024.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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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이라는 제목은 종종 들어봤지만 천선란의 책을 '읽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장편을 기대하고 펼쳤으나, 요즈음의 책들이 종종 그렇듯 소설집이라는 이름이 붙은 단편집이었다. 소설집이라고 불리려면 적어도 하나의 세계관을 가지고 가야하지 않냐고, 조금 투덜거리면서 두 번째 이야기를, 세 번째, 네 번째 이야기를 읽었다. 

방금 천선란을 쳐보고 기억이 났다. 사실은 [랑과 나의 사막]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름 때문인지, 나는 천선란을 늘 꽤 어른인 작가로 여기고 있었다. 생각보다 젊다는 사실에 놀랐고, 어리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던 글솜씨에 놀랐다. 

노랜드는 SF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편하게 읽을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그러나 한국 작가들의 SF가 가끔 그렇듯, 어떤 것들은 아예 과학을 포기해버리기도 했다. 과학적인 척, 하는 것처럼 하려는 소설을 볼 때는 마음이 종종 불편해지곤 했는데, 천선란의 글은 아예 동화같은 면이 있어서 오히려 괜찮았다. 재밌다고 느꼈다. 슬펐고, 기뻤고, 맺음짓지 않고 끝내는 글들이 미웠다. 괜찮은 글을 읽을 때면 항상 드는 감정들이었다.

 

앞쪽은 보다 비현실, 혹은 먼 미래의 이야기들이, 뒤로 갈수록 왜인지 익숙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이야기들이 품은 색채는 하나같이 표지와 비슷한 어두운 푸른빛이다. 해가 다 넘어가고, 이내 새벽이 오기 직전의 시푸른 색. 뼈가 다 시려오고, 가슴 깊숙히 추워지지만 결코 도망칠 수는 없는 순간.

각 단편들은 이별을 이야기한다. 그 이별들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처럼 우주를 사이에 둔 이별이 되기도 하고, 우리가 흔하게 겪듯 삶과 죽음을 사이에 둔 이별이 되기도 한다. 이름을 잊은 몸들은 죽지 못하고 헤메고, 잊히고 싶지 않은 이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오고, 살갑게 이름불린 이들은 그걸 잊지 못해 돌아오려 한다. 

사랑해 마지않던 사람들을 연이어 떠나보내게 되면 마음은 주는 것이 아니라 보관해두는 것, 기댄다는 건 그것이 사라졌을 때 넘어진다는 것, 함께한다는 건 섞일 수 없는 물체가 잠시 머물다 갈 뿐이라는 것. [흰 밤과 푸른 달]

 

그리고, 소설집의 마지막에서 작가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해와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몰이해 속에서도 과연 사랑은 싹트는가.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사랑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한때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는가. 사랑이 먼저인가, 이해가 먼저인가. 둘은 과연 다른가.

 

[두 세계]와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의 소재는 익숙하다. 김초엽 작가의 책에서 이미 접해보았던 내용과 퍽 닮았다.

https://in-mybookshelf.tistory.com/119

 

[로라(방금 떠나온 세계)-김초엽]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데뷔한 김초엽 작가의 신작이다. SF라는 장르가 얼마만큼 서정적이어질 수 있나를 보여주는 것 같은 김초엽 작가의 단편들은 한층 그 색채가 깊어졌다.

in-mybookshelf.tistory.com

 

과학이 넓고 깊어질수록, 우리는 한때 정확히 알지 않아도 괜찮았던, 그래서 이해하고 사랑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것들에 이름과 정의가 붙고 분류가 되어 차이가 낙인찍혀지는 것을 본다. 

점점 이해가 어려워지는 세상에 살아가는 것만 같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날때부터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은 없었고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것들은 치열한 노력과 기나긴 사랑 끝에 이루어진 결과들이 아니었는지, 그리하여 오늘날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기는 그 많은 것들을 분류하고 이름붙이는 노력 말고, 왜곡되지 않은 시선으로 가만히 바라보아주는 것이 절실히 필요한 일이 아닐런지,

작가들은 그걸 묻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특히 좋았던 단편들 : [푸른 점] [재, 제] [우주를 날아가는 새] [이름 없는 몸] [두 세계]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

한 권이 아니라 다섯 권쯤은 너끈히 읽은 기분이 들게 하는 책이었다.

 

 

모두 지구를 향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이었던,
우리가 사랑했던 세상 모든 존재들이 있던 저 작고 푸른 점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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