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길었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내가 가장 먼저 결심한 것은 여행의 이유를 읽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유명한 책과 유명한 작가라 제목도 이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읽어야 할 어떤 이유나 계기가 없이 그저 시간이 흐르다가, 제대로 된 '나의 여행'을 마치자 문득 떠오른 것이다. 그런 책이 있었더라, 하고.
이 책에는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여행을 개척해 본 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인생도 지구에서 우리가 벌이는 한 바탕의 여행이라는 은유에 빗대어 생각해보았을 때, 여행을 해 보지 않은 이도 그 내용들에 공감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가 지구별 여행자가 아닌가.
환대의 순환
우리가 이 낯선 행성에서 최초로 세상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아주 여리고, 유약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우리는 타인의 온정과 선행에 기대어 여기까지 왔다. 마찬가지로, 낯선 여행지에서의 여행자 역시 현지인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여행할 수 없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얻은 선의를 자국으로 돌아갔을 때 우리나라로 온 여행자들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선의의 고리가 형성된다고. 받은 것을 바로 그 사람에게 돌려줄 수 없을지 몰라도, 우리의 선의는 결국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전달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여행이라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자기가 받은 만큼의 친절을 베풀게 된다. 우리가 베푼 친절은 무의미하지 않다. 그것을 받은 이에게로 가 또 다른 친절의 밑바탕이 되어줄 것이다.
일상의 도피
이 책, 심지어는 작가 김영하의 문장 중 가장 일반 대중이 잘 아는 것을 뽑으라면 틀림없이 아래 문장일 것이다.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 집은 안식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상처의 쇼윈도이기도 하다.
알쓸신잡에서도 등장해 유명해진 이 말은 한동안 여러 SNS를 돌며 여러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우리는 참 많은 것들로부터 상처받는다. 아직 다 낫지 않은 상처를 상기시키는 상황, 익숙해지지 못한 감정을 유발하는 사람, 나에게 모멸을 안겨준 사건의 재현으로부터 우리는 끊임없이 도망치고싶어하지만 그럴수록 더 상처입을 뿐이다. 완전히 새로운 도시로의 여행은 완벽한 도피처럼 보인다. 매일 청소하고 여행객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호텔에서의 숙박은 이전 삶의 상처를 잊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어느 모퉁이에서건 우리는 다시 그 상처를 만나게 되고, 어느 순간에는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영영 미룰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여행이라는 일시적 도피, 혹은 도전은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준다. 일상의 상처를 보다 멀리서 볼 수 있도록 해주고, 그것이 낯선 환경에서의 생존과 비교하면 얼마나 하찮은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때론 그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의 그림자
그러나 책을 통틀어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바로 사람 '그림자'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에는 악마에게 그림자를 팔고 부자가 된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러나 부자가 되었음에도 그는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 사이에 끼지 못한다. <사람, 장소, 환대>(김현경)라는 책에서 작가는 이 그림자는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무엇'(성원권)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타인이 우리를 사람으로 받아들여주어야 한다.
작가는 자주 떠도는 사람이라면 겪었을 고민에 대해 말한다. 한 곳에 정착하여 그림자를 되찾고 '성원'으로서의 삶을 사느냐, 혹은 그림자 없이 영영 떠도는 방랑자가 될 것인가.
작가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끝났다. 이것은 각자의 삶에서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니까. 하지만 방랑이 더 달콤하고 마음 편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정착하여 사는 것이 후회 없는 길인 모양이라고 혼자서는 생각했다. 쉽게 느껴지는 것에는 모두 그 이유가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거나, 해야 할 일에서 도피하는 선택이거나,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외면하는 길인 경우가 많다. 성원권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김현경의 책을 읽어보아야 제대로 알게 되겠지만, 내 삶에 빗대어 생각해보면 아마도 자기인식과 삶을 통해 얻게 되는 주관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무리에 끼어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불편함과 뒤틀림 없이 내 그대로를 내보였을 때 우리의 일원 취급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미묘한 언행, 습관, 가치, 잡담 같은 것들 말이다.
여행의 끝
모든 여행은 반드시 끝난다. 언제든, 어디서든. 때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고, 때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여행의 끝에 우리가 어떤 모습일지만은 언제든 결정할 수 있다. 많이 틀리고, 많이 배우고, 고통과 사건사고와 우연들 속에서 성장하여 마침내 웃고, 평안하여 돌아올 여행 끝에서의 나.
이 지구에서의 여행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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