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작가의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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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작가의 단편집, '트로피컬 나이트'가 내게 실망을 안겨줬다면, 장편인 '스노볼 드라이브'는 또다시 기대를 하게 될 만큼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그다지 어렵지는 않지만 충분히 참신하고 흥미로운 소재, '녹지 않는 눈'으로 꽤나 재미있는 전개를 해 냈다.
누군가 지구를 통채로 박제해버릴 심산인 듯 했다.
-스노볼 드라이브, 36p
멸망의 진실. 지지부진하고 느리게 무너지는 세상. 망할듯, 망하지 않으며, 그러나 착실히도 멸망을 향하여.
하늘에서 실리카겔(;습기제거제, 김 같은 보존 식품에 들어 있는 투명하거나 하얀 알갱이)이 내리는데도 세상은 곧바로 망하지 않았다. 감염병이 발발하고 전쟁이 일어나고 기후위기가 닥쳐도 근근히 이어지는 우리 세계와 같이. 친환경을 표방하던 한 화장품 회사에서 시작된 인공 눈. 지구를 모두 덮을 만큼 내렸으나 결국 사람마저 전부 덮지는 못했던.
피해는 더디게 복구되었다. 그 사이에 돌이킬 수 없도록 무너지는 것들이 더 많았다.
-스노볼 드라이브, 35p
그러나 결코 무너지지 않는 것도 있었다. 사회 질서, 돈, 재벌들, 의사결정을 하는 정치인들.
주인공인 이월과 모루는 청소년이다. 눈 피해가 가장 심한 백영시, 냉큼 눈 소각장을 지어버려 도망칠 수 없는 이들은 유독한 눈의 무덤에 남았다. 쌓이는 것은 눈이지만 죽어나는 건 사람이었다. 그 눈을 모조리 거기에 쌓아두기로 한 것도 사람이었으므로, 싸울 수조차 없는 사람들은 천천히 병들어 죽어갔다.
갈 곳도 갈 수 있는 곳도 없었다. 매일같이 베란다 창가에 앉아 눈이 내리는 바깥을 멍하니 바라봤다.(...) 하루 종일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꼭 시간이 멈춘 세상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건 꿈에서 반만 깬 것처럼 몽롱한 감각이었다.
-스노볼 드라이브, 36p
코로나를 겪으며 우리에게는 '멸망'이라는 감각이 낯설지 않아졌다. 처음 코로나가 발발했던 그 해 겨울, 그리고 봄이 올 때 까지도, 그 뒤로 몇 번의 계절이 더 바뀔 때까지도 쉽게 잦아들지 않던 감염병의 추세로 인해 우리는 모두 안전한 집 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다만 창문만 바라보고 앉아있다보면 현실감은 멀어지고 뇌로 가는 혈류량은 줄어들고 우리는 다만 꿈꾸듯이 몽롱한 상태로 존재하게 되었다.
책의 이 구절은 그렇기에 낯설지는 않았고 다만 적절한 묘사인 것 같아 마음이 좋았다. 작가도 지난히도 길던 지난 겨울들에서 비슷한 것을 느꼈겠지. 우리를 옥죄던 두려움이 점차 멀어지고, 다만 나가지 못하는 현실만이 남았을 때 그대로 멈추지도, 나아가지도 못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날들에.
코로나를 겪은 후, 모든 재난물은 한층 현실다워졌다.
이게 우리가 발 붙이고 사는 세상이었다. 도시, 사람, 짐승, 쓰레기, 진실. 그런 것들은 결국엔 눈에 파묻히는 것이다.
이월과 모루는 그러나 그 스노볼같은 박제된 듯 변하지 않는 세상 속을 내달린다. 두 손 꼭 잡고, 끝이 뻔히 정해진 듯 보이는 길을 달려나간다. 살아있다면, 산 듯이 살아야 하는 거니까.
이 여정에 목적지 따위가 없으면 좋을 것 같았다. 목적지가 있는 여행은 지루하니까. (...)
꼭 영원히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지부진하고 느리게 멸망하는 오늘의 세상에게, 그럼에도 우리는 달릴 거라고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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