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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책

[트로피컬 나이트-조예은] 싱싱한 책 한 권 베어물기

by seolma 2022.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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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피컬 나이트-조예은

 

이토록 촌스러운 제목과 이토록 미적인 표지. 

둘 중 하나라도 모자랐다면 집어들지 않았을, 소설이라기보다는 다이소에서 파는 레트로 PVC 다이어리 같은 외관의 책이었다. 책에 싸구려라는 말을 붙이니 모욕같지만, 어떤 예술들은 '싸구려' 감성을 내뿜고 그래서 좋은 것들이 있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책을 폈다. 

 

조예은이라는 신인 작가는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소설 좋아한다는 각기 다른 두 친구가 추천한 책 두 권이 공교롭게도 조예은이었어서, 그 이름만큼은 무의식에 남아 있었다. '칵테일, 좀비, 러브'라는 제목이 어디 잊히기 쉬운 제목인가. 그 책은 몇 장 넘겨보고는 더 이상 읽지 않았다. 좀비물은 내가 사랑하는 장르다. 그러나 나는 개인의 일이 되어버린 좀비물은 좋아하지 않는다. 냄새나고 구질구질 하게 느껴져서 싫어한다. 아포칼립스와 디스토피아의 느낌을 사랑하는 거지, 내 가족이 좀비가 되어 우리집 베란다, 안방에 묶여있는 장면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여튼 그러한 이유로 '칵테일, 좀비, 러브'를 제낀 후에, 이 책은 조예은 책 중 내가 가장 처음으로 접한 책이 되었다. 

 

연작은 아니고 그냥 단편집이었다. 기괴함이라는 주제가 이어지는 것 같기는 한데 내용이나 메시지는 딱히? 그냥 편하게 읽어도 될 법 하다. 

단편 하나씩에 대한 짧은 감상을 적어보자면. 

 


  • 할로우 차일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작품들이 있다. 어렵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냥 태어난 이유가 아리송하다고나 할까. 이 단편이 그랬다. 소재와 주제는 어렵지 않았다. 투명해지는 어린이, 어린 시절의 우리가 느꼈던 불완전함, 불안함, 세상이 나를 빼고 돌아가는 듯한 묘한 소외감, 모두가 나보다 능숙하고 현명하다는 데서 오는 존재의 불안정함. 그것을 시각화했다고 이해는 됐다. 

딱히 놀랍거나 의외이진 않은 그 주제를, [아가미](구병모)에서 이미 겪었던 구어체로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는 이 단편은 무의미하고, 지루하고, 뻔했다. 

 

 

  • 고기와 석류

나는 상징으로 탄생하여 상징으로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대를 반영하거나, 몰랐던 것을 들추거나, 복잡하게 얽힌 상황을 명료하게 상징하거나 중에는 하나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기깔나게 재밌기라도 하든가. 석류라는 이름이 붙여진 작은 괴물은 인육을 뜯어먹었다. 너무도 외로웠던, 그러나 외롭게 죽기는 죽기보다 싫었던 한 노인 옥주가 그런 괴물을 주워다 기른다. 철저히 옥주의 시선에서, 자신에게 온정을 느끼는 듯한 사람 먹는 사람 모양의 괴물. 사회적 고립이 너무나도 두려운 나머지 옥주는 자신의 살까지 내어주며 괴물을 곁에 둔다. 

누군가는 수만 가지로 이 단편을 해석하겠지. 그러나 나는 딱히 그러고 싶진 않았다.

 

 

  • 릴리의 손

결국은 타임 패러독스로 귀결되는 단편. 소재는 뻔해도 재미있었다. 그러나 감내할 수 없는 몇몇 오류들. 대충 쓰인 SF라니, 속으로는 경악을 하며 읽었다. 흥미로운 인물과 흥미로운 설정. 놀라웠던 반전과 안타까운 사랑. 사랑이 인간에게 가장 우선시되는 가치라는데에는 반대하지만, 시대가 아무리 지나도 여전한 위안임은 인정하게 되는 이야기. 그러나 과학적 근거 없이 쓰인 SF는 모래로 지은 성처럼 우스웠다. 

  • 새해엔 쿠스쿠스

피곤해 미쳐버리겠어서 읽다 덮어버리고 싶을 만큼 생생하게 표현된 모녀관계. 굳이 그걸 책 속에서까지 봐야 하나 싶을 정도로 현실적이라 조금 스트레스를 받는다. 해피엔딩도, 배드엔딩도 아니고 그냥 찜찜한 쉼표를 찍어버리는 작가의 마무리는 그런 면에서는 적절한 선택인 것 같다. 

세상 모두가 스트레스로 죽기 전에 도망칠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가장 작은 신

가장 작은 건 아무래도 원자, 개념적으로는 쿼크이려나. 나는 먼지폭풍으로 인해 변한 사회라는 소재를 깨달았을 때 이 단편만큼은 정말 흥미로워지겠구나 기대했다. 이 소재만큼은 어떻게 비틀어도 SF니까, 어쨌든 SF겠지. 그러나 이 책은 마지막까지 내 기대를 부숴놓았다. 신.. 그렇구나. 제목이 신이었지. 

묘하게 유사과학 사이비 느낌이 나는 전개와 귀결이 작가가 바라는 바라면 성공적이긴 한데 여전히 이유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할로우 차일드처럼 무의미하고, 릴리의 손처럼 비과학적이라고 느껴졌다. 

 


 

'가장 작은 신'에서 너무 큰 실망을 해버려서 뒤의 단편은 계속해서 읽지 못했다. 테드 창이나 김초엽의 소설을 읽다가 조예은으로 넘어온 탓인가. 소재에 기대한 내가 잘못이라면 잘못인 것 같다. SF 장르를 좋아하고, 다양한 SF를 접해본 사람들이라면 읽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장을 넘길수록 쌓이는 스트레스에 작가를 조금 미워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다만 확실히 소재나 캐릭터 구축이 눈에 띄게 흥미롭고, 젊은 작가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글들을 쓴다는 감상은 남는다. 나는 이 작가의 다른 장편을 기꺼이 읽어볼 것이다. 그러나 그 장편도 나에게 동일한 스트레스를 남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있다. 

환경이나 사람과 연관되어 주목이 필요하고 논쟁하여 해결해야 하는 과학적 소재-AI, 미세먼지, 인공 눈(스노볼 드라이브)-를 단지 재미있겠다는 이유로 가져와서 아무런 조사 없이 써버리는 건 작가로서 좋지 않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그냥 재미로 그저 그렇게 대중이 질려버리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다. 우리의 생존과 우리의 행보에 결부된 수많은 생명체들의 생존을 위하여. 그런 의미에서는 이 작가가 저지른 일이 미필적 고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멀미라는 스쳐가는 소재를 쓰면서도 원리를 조사하여 글에 녹여낸 김영하 작가의 글을 뒤이어 보면서 더욱 절실히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쳐다보게 되고, 실망 속에서도 한 번 더 글을 읽게 되는 매력. 그건 분명 작가가 가지고 있는 능력일테다. 이렇게 길게 비판을 썼음에도, 끝까지 누구도 배려하지 않고 어떤 머리아픈 사려도 글에 베풀지 않고 싶다면, 나는 작가가 더 거침없고 더 열정적으로 그런 글들을 쓰길 바란다.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 좁으면 남들 보고 비키라지. 공간을 크게 쓰고 누가 뭐라든 해결하는 건 남들에게 맡겨버려요. 문제해결이 직업인 사람들이 따로 있잖습니까?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시선으로부터,

 

아마 나는 계속 비판하면서도 묘한 기대를 가지고 읽어보게 될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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