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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책/시 모음집

[바다/고래/파도 관련 시 모음] 바다에는 고래가 살고, 나비가 날고, 나는 그들에게서 내 삶을 본다

by seolma 2020.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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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의 꿈

                송찬호

 

 

나는 늘 고래의 꿈을 꾼다

언젠가 고래를 만나면 그에게 줄

물을 내뿜는 작은 화분 하나도 키우고 있다

 

깊은 밤 나는 심해의 고래방송국에 주파수를 맞추고

그들이 동료를 부르거나 먹이를 찾을 때 노래하는

길고 아름다운 허밍에 귀 기울이곤 한다

맑은 날이면 아득히 망원경 코끝까지 걸어가

수평선 너머 고래의 항로를 지켜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한다 고래는 사라져버렸어

그런 커다란 꿈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아

하지만 나는 바다의 목로에 앉아 여전히 고래의 이야길 듣는다

해마들이 진주의 계곡을 발견했대

농게 가족이 새 뻘집으로 이사를 한다더군

봐, 화분에서 분수가 벌써 이만큼 자랐는걸……

 

내게는 아직 많은 날들이 있다 내일은 5마력의 동력을

배에 더 얹어야겠다 깨진 파도의 유리창을 갈아 끼워야겠다

저 아래 물밑을 흐르는 어뢰의 아이들 손을 잡고 쏜살같이 해협을 달려봐야겠다

 

누구나 그러하듯 내게도 오랜 꿈이 하나 있다

하얗게 물을 뿜어올리는 화분 하나 등에 얹고

어린 고래로 돌아오는 꿈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바닷가에 대하여

                           정호승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게 좋다

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 

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

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

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때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었을 때

모내기가 끝난 무논의 저수지 둑 위에서

자살한 어머니의 고무신 한 짝을 발견했을 때

바다에 뜬 보름달을 향해 촛불을 켜놓고 하염없이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싶을 때

바닷가 기슭으로만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좋다

자기만의 바닷가로 달려가 쓰러지는 게 좋다

 

 

 

땅끝 

                      나희덕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좇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 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 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 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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