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s/시 모음집

[살아갈 힘을 주는 시 모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by seolma 2020. 7. 20.
728x90
반응형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폐허 이 후

                        도종환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메말라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기

                   도종환

 

새 한 마리 젖으며 먼 길을 간다

하늘에서 땅끝까지 적시며 비는 내리고

소리내어 울진 않았으나

우리도 많은 날 피할 길 없는 빗줄기에 젖으며

남 모르는 험한 길을 많이도 지나왔다

하늘은 언제든 비가 되어 적실 듯 무거웠고

세상은 우리를 버려둔 채 낮밤없이 흘러갔다

살다보면 배지구름 걷히고 하늘 개는 날 있으리라

그런 날 늘 크게 믿으며 여기까지 왔다

새 한 마리 비를 뚫고 말없이 하늘 간다

 

 

 

 

처음 가는 길

                         도종환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뿐이다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

두려워 마라 두려워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

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김기택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 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 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 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