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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시 모음집

[자화상] 제목이 같은 시 5편

by seolma 2020.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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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자기가 그린 자기의 초상화

 

 

 

자화상 

                        오세영

전신이 검은 까마귀,
까마귀는 까치와 다르다
마른 가지 끝에 높이 앉아
먼 설원을 굽어보는 저
형형한 눈,
고독한 이마 그리고 날카로운 부리.
얼어붙은 지상에는 그 어디에도 낟알 한 톨 보이지 않지만
그대 차라리 눈밭을 뒤지다 굶어죽을지언정
결코 까치처럼 
인가人家의 안마당을 넘보진 않는다.
검을 테면
철저하게 검어라. 단 한 개의 깃털도
남기지 말고......
겨울 되자 온 세상 수북이 눈을 내려
저마다 하얗게 하얗게 분장하지만
나는
빈 가지 끝에 홀로 앉아
말없이
먼 지평선을 응시하는 한 마리
검은 까마귀가 되리라.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를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 이고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자화상 

                이길원

놈은
가슴 속에 칼을 하나 감추고 있다
누군가 달려들면 내려칠 칼날을
놈은 날마다 칼날을 간다
날이 시퍼렇게 서도록
나를 보호해줄 건 이것 뿐이라며
갈고 또 간다
그러다가도
정작 휘둘러야 하는데
차마 차마 망설이다가
제 가슴이나 후비며
자상이나 입히는
써보지 못하는 칼날 하나 
숨기고 산다

 

 

 

 

자화상 

                    김초혜

오늘은 오늘에 빠져버렸고
내일은 내일에 허덕일 것이다
결박을 풀고
집을 떠나려 하나
벗을 것을 벗지 못하는
거렁뱅이라

 

 

 

 

 

자화상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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