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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헝거게임] 개인 속의 사회, 사회 속의 개인.

by seolma 2021.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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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판엠의 불꽃-캣칭 파이어-모킹제이 파트원(번역된 제목은 모킹제이)-모킹제이 파트 투(번역된 제목은 더 파이널)

  헝거게임의 소제목은 각 영화의 전개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캣니스가 캐피톨에 가며 일으키게 되는 불꽃(1편)이, 2편에서는 번지게 되고, 그로 인해 일어난 혁명의 모킹제이가 되는 캣니스의 모습을 순차적으로 영화는 그려낸다. 

 

불이 번지고 있어. 우리가 불타면, 당신도 우리와 함께 불타는 거야.

_헝거게임;모킹제이에서 스노우를 향한 캣니스의 말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대사.

 

  영화는 재미있는 편이다. 특히 1편은 신선함 면에서 나쁘지 않다. 다음 단락부터는 비평이 있을 예정이지만, 나는 이 시리즈를 꽤나 재미있게 보았다. 


  책이 영화보다 낫다는 말은 나 역시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원작이 있는 영화는 원작을 모두 담으려다 망하거나, 원작을 아예 배제하려다 망한다. 물론 성공적으로 조율을 이뤄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헝거게임은 그걸 성공하지는 못한 영화로 보인다. 

 

  책을 읽지 않았어도 그런 것들이 쉬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영화의 장면들, 12구역의 숲과 광장, 열차와 캐피톨, 아레나 같은 것들은 영화로 보는 것의 장점을 느낄 수 있었다. 캣니스에게서 희망을 보는 각 구역 사람들의 세 손가락을 들어올리는 장면 역시, 명확하게 의미를 설명하지는 않아도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쉬운 점들은 사실 일일이 늘어놓기에는 너무 많다. 솔직하게 말하면 영화의 장점과 단점은 거의 비등한 수준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몇 가지를 말하자면 약간은 아쉬운 배우의 연기(연기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지만 배우의 걸음걸이와 행동 등이 운동을 하고 살인 기술을 배운 캐릭터같지는 않아서 아쉬웠다), 지나친 비약과 생략, 그리고 상실된 주인공의 진실된 매력이 있겠다. 

  마지막이 가장 아쉬운 점이다. '캣니스 에버딘'은 매력적이다.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캣니스는 동생을 위해 1/24만이 살아남는 헝거게임에 자원한다. 살아남고, 눈앞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눈물흘리며, 권력을 쥐고 사람들을 흔드는 '나쁜' 지도자의 의도에 반하는 행동을 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존재가 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카메라 화면에 비춰지는 'The girl on fire', '모킹제이'인 캣니스의 모습이다.

 

  캣니스는 늘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움직였다. 동생을 위해 헝거게임에 자원한 이후, 그는 언제나 분노에 의해 행동한다. 게임메이커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들을 향해 활을 쏘고, 자신을 도와준 어린 아이가 경기장에서 죽자 헝거게임에서 승리한 후에 아이의 고향에 찾아가 진심을 담은 연설을 건넨다. 스노우의 농간으로 또다시 헝거게임에 차출되자 경기장에서 돔의 천장을 향해 활을 날리고, 반군의 모킹제이로 활약할 때는 캐피톨이 부순 삶의 터전과 사람들을 보며 분노한다. 그리고 그 모든 행동은 좋은 결과로 돌아온다. 마침내 영화를 보는 우리가 그 기묘함에 거부감을 느낄 때까지. 오직 주인공이기 때문에 성공하는 주인공에게 누가 매력을 느끼겠는가? 더불어 영화 속 캣니스는 스스로도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방송에 비춰지는 자신에게 반감을 갖는다. 하지만 카메라가 돌지 않을 때의 캣니스는 끊임없이 자책하고, 걱정하고, 다른 이들의 희생을 강요하다시피 하여 살아남으며(강요의 주체는 물론 캣니스가 아니라 영화다), 결국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오직 주변인의 위로와 조언이 있어야만 행동하는 주인공이라니. 그렇기 때문에 3편부터, 영화는 스스로 주인공을 배제하기 시작한다. 대개는 그런 식이다-캣니스가 기절한 후 깨어나면, 상황은 끝나 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전개는 마지막 편에서 절정에 달한다. 

  캣니스는 자신을 이용하는 코인 대통령에게 반감을 갖게 된다. 대통령이 진행하는 전쟁의 가치관이 캣니스 자신의 가치관과 맞지 않기 때문에 그 갈등은 더욱 심화된다. 오로지 스노우 대통령을 향한 복수심과 분노로 움직이는 캣니스와 달리, 코인은 새로운 판엠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움직이는 인물이다. 캣니스는 그 욕망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자신의 기준에서, 그 욕망은 틀린 것이니까. 하여 마지막 순간에 캣니스는 여전히 반군의 상징적인 존재, 모킹제이로서 스노우와 코인의 앞에 서게 되고, 자신의 동생을 죽인 코인 대통령을 향해 화살을 날린다. 

 

  솔직히 말하자면 스노우와 코인이 없었다면 캣니스는 12구역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 내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헝거게임에서 캣니스는 끊임없이 승리한다. 캣니스 스스로 그 승리를 믿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지만, 그녀가 승자로서 수많은 이득을 누리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그 승리가 정말 캣니스의 것인가? 헤이미치가, 에피가, 피터가, 시나가 없었다면, 캣니스는 모킹제이는 커녕 살아남지도 못했을 텐데? 하지만 영화는 오직 캣니스만을 조명한다. 앞서 말한 모든 이들이 사라지자 단지 땋은 머리와 활만이 남는 한 무의미한 캐릭터를. 

 

 

 

  영화에 대한 혹평이 이렇게 길어진 것은 사실 헝거게임이 꽤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만 놓고 보면 소재도, 인물도 신선하다. 어쩌면 책은 정말 더 나을지도 모른다. 캣니스가 정말 단순한 장기말이었다고 한들 그가 일으킨 변화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변화란 사실 주도하는 자조차 모르게 일어나는 경우가 태반이니까. 캣니스는 수많은 이들의 희망이 되어 불타올랐고 마침내 세상을 바꾸었다. 그게 중요한 것도 사실이므로, 영화는 아무리 서투른 부분이 있대도 내게 어떠한 물결로 남았다. 

 

  캣니스만을 조명한다고 까내렸으나, 사실 영화의 끝에는 스노우와 코인 역시 남는다. 주인공과 대립되는 악역 그 이상의 존재들로서. 사실 나는 끊임없이 갈등했다. 스노우와 코인 중, 누가 더 나은 지도자일지. 캣니스 스스로 말했듯이, 캣니스는 지도자감은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선과 정의만으로는 확실히 부족할 것이다. 영화 끝자락의 플루타르크의 말처럼, 인간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파괴를 사랑한다. 어쩌면 그러한 파괴 본능을 능숙하게 조절한 스노우야 말로 현명한 지도자일지 모른다. 체제를 뒤엎고 반역에 성공한 코인이 헝거게임이라는 잔혹한 단어를 또다시 입에 올리는 것 역시, 그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야기는 마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떠오르게 한다. 마을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 끊임없이 고통받는 한 아이. 현대에서도, 우리의 안락하고 풍족한 삶을 위해 삶을 잃어가는 지구 어딘가의 사람들과 동물들이 있는 것처럼. 

  그걸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치 않는다. 인류는 늘 도전하고, 실패하면서도 나아가니까. 어쩌면 언젠가는 우리는 알맞은 해결책을 맞닥뜨릴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고민하고, 걷는다면. 

 

  판엠을 부흥시켰던 불꽃이자, 판엠을 무너뜨린 불꽃이 된, 헝거게임에 대한 이야기.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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