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없는 물이기도 하고
살다가 보면 가끔 앞날이 없는 것처럼 막막하고 불행한 순간들이 찾아온다.
꼽아보면 세상 어디든 흔히 있는 일이었고, 그것이 한 사람에게 연쇄적으로 닥쳐오는 일도 그리 드물지 않았으며 한 가지 불행은 철저하게 다른 연속된 고통의 원인이나 빌미가 되기 마련이었다.
대개 그런 일들은 또 다른 불행을 불러들이며, 그렇게 불행하진 인간은 때로 다시 일어설 힘을 잃는다.
아이의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었다. 삶에 치이고 쫓겨 마침내 가장자리까지 밀려난 아이의 아버지는 모든 힘을 잃고 수증기 가득한 밤 호수에 빠져버리고 만다. 자신이 없다면 어떤 미래도 없을 아이도 함께 안은 채.
하지만 아이는 아버지의 절망보다 간절하게 살고 싶었던 모양인지 운 좋게 한 노인과 손자에게 구해진다. 아이를 씻기던 손자는 아이의 목에서 금이 간 듯 갈라진 상처를 발견한다. 상처를 살펴보자 금에서 물이 흐르며 벌어져 선홍빛 속이 드러난다. 아가미. 아이는 아가미가 있었다.
손자 강하는 곤의 아가미에 현혹된다. 더럽고 고된 세상을 살아가며, 강하가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기적같은 어떤 것. 강하가 그 아가미에서 본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이후로 강하는 곤을 세상에게 빼앗길까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곤은 그런 강하를 그저 바라본다. 곤에게 물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물의 아름다움과 자유로움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닌 것이었다. 곤은 물에서 가장 행복했다.
빠져 죽어버릴 뻔 한 물에서 자유를 되찾는다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삶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죽음이 존재함으로써 존재하는 생. 죽음이라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치 있는 생. 그런 의미에서 곤의 아가미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다.
강하는 그 환상에 반해 평생 곤을 지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강하는 곤을 떠나보내야 했고, 그 둘은 서로가 없는 시간들을 보내며 서로를 추억했다. 그 시간 도중에서 곤은 강에 빠진 해류를 구해내고, 해류로 인해 곤은 강하의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된다.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매 순간 흔들리고 기울어지는 물 위의 뗏목 같아요. 그 불안정함과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이 마음과 앞으로의 운명에 확신이라곤 없다는 사실 뿐이지 않을까요. (194, 해류의 말)
그리고 곤은 강하를 찾아, 바다로 떠난다.
"날 죽이고 싶지 않아?"
"...물론 죽이고 싶지."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곤은 지금껏 자신이 들어본 말 중에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예쁘다'가 지금 이 말에 비하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폭포처럼 와락 깨달았다. (185)
사실 우리는 모두 곤의 아가미와 같은 것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남들에게 보여서는 안 될 어떤 것. 그것은 불온한 생각일수도, 부끄러운 가정사일수도, 과거의 트라우마일수도 있다. 우리는 기를 쓰고 그것을 숨기며 살아가지만, 때로는 누군가에게 들키면서, 들켜서 더러운 것이라 욕을 먹거나, 혹은 너도 그런 상처를 가졌냐고 유대감을 얻으며 살아간다.
혹 누군가는 그 상처를 아름다워 할 수 있다. 곤의 선홍색 아가미와 빛나는 비늘은 삶이란 바닥없는 물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마치 희망처럼, 구원처럼 비쳐졌다. 그건 오직 삶에 숨막혀 본 이만이 알아보는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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