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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책

[헝거게임/캣칭파이어/모킹제이 책] 인간은 생존을 넘어 삶의 주인으로 살기를 바란다

by seolma 2022.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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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제목은 [헝거게임 캣니스, 인간은 생존을 넘어 삶의 주인으로 살기를 바란다](K-스피릿, 강만금 기자) 의 기사 제목을 인용했습니다.
 
 

헝거게임 영화 : https://in-mybookshelf.tistory.com/76?category=903688 

 

[헝거게임] 개인 속의 사회, 사회 속의 개인.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판엠의 불꽃-캣칭 파이어-모킹제이 파트원(번역된 제목은 모킹제이)-모킹제이 파트 투(번역된 제목은 더 파이널) 헝거게임의 소제목은 각 영화의 전

in-mybookshelf.tistory.com

 

 

헝거게임 책 3부작

  1. 헝거게임
  2. 캣칭 파이어
  3. 모킹제이

 

 

  영화를 보고 썼던 감상에서 나는 책이 영화보다 훨씬 나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원작 소설 세 편을 모두 보고 난 후, 내가 드는 생각은 영화가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니었다는 거다.

 

  대개의 경우 나는 원작 소설을 영화보다 선호한다. 책은 내용이 더 풍부하고, 깊고, 감정에 동화되기가 더 쉬우며 화려한 미장셴을 볼 수 없으므로 상상하게 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내가 어느새 자극적이고 편안한 영화 감상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헝거게임의 책을 볼 때는 그 만큼의 감동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이미 영화로 너무 익숙해진 내용이라, 그런 진부함이 감동을 막았거나.  
  확실히 등장인물들의 이미지가 시각적으로 굳어져버린 채로 그들을 묘사하는 문장을 읽는다는 건 좋지 않았다. 피타는 내가 아는 것(영화 속 배우의 모습)보다 훨씬 부드럽고 잘생긴 사람이었고, 캣니스는 우리의 영화 주인공보다 깡마르고 날카로운 청소년이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책을 보는 것의 장점도 분명 있었다. 특히 책 속에서 캣니스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들에서 자연스럽게 영화 속에서 내가 직접 들은 노래를 떠올릴 수 있다는 점이 그랬다. 장면의 색과 동작들은 희석되고 잊혀도, 멜로디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책이 먼저였다면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아름다운 멜로디들을 나는 종이를 넘기며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https://youtu.be/ZKAM_Hk4eZ0

모킹제이에 등장하는 캣니스의 노래

 


그리고 영화를 보며 내가 비판했던 점들이 책에서는 나름 훌륭하게 설명되는 듯 보였다.

  영화 속에서 나는 캣니스가 기절하고 깨어나면 일들이 진행되어 있다는 식의 편리하고 손쉬운 진행 방식에 대해 불평했었다. 캣니스가 일으킨 불꽃이 만들어낸 혁명이라기에, 캣니스는 너무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이용당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스스로의 행동에 매 순간 확신조차 갖지 못했다. 헝거게임 1편에서의 배틀로얄 장르의 주인공으로서는 괜찮았지만, 점차 혁명을 이끄는 상징이 되어가는 2, 3(영화에서는 2~4)에서는 철저한 실격이었다.

 

  나는 앞서 쓴 블로그에서 캣니스를 이렇게 평가했다. “ 오직 주인공이기 때문에 성공하는 주인공, 오직 주변인의 위로와 조언이 있어야만 행동하는 주인공

 

  책을 보니 알겠다. 이건 영화가 책과 달리 캣니스의 일인칭 시점이 아니라 혁명의 불꽃이 피어나는 구역들 전체를 비추기 때문이었다. 책과 달리 영화에서는 캣니스의 고통과 감정선보다는, 그녀가 일으키는 행동의 파장과 상징으로서의 가치가 더 부각된다. 보는 우리 역시 주인공보다는 반군의 전쟁의 승리여부, 혁명의 목적과 과정 같은 것에 더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캣니스의 설명과 감정이 배제된 채 장면을 보여주는 영화 vs 그에 얽힌 캣니스의 과거와 캣니스만의 감정들을 설명하는 책

  영화에서는 심지어 캣니스는 결코 보지 못하는 장면들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더 이상 캣니스 에버딘이 아니다. 우리는 한 개인으로 정의되지 못하는 관점으로서 영화를 본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캣니스를 변호하고자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캣니스 에버딘이 고작 열여섯(헝거게임)~열일곱(캣칭파이어&모킹제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는 주인공의 나이에 대해 크게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책을 보면서 더욱 크게 깨달았다. 캣니스는 어린애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열 두살부터 혁명의 상징이 된 열 일곱살까지, 그녀는 쭉 한 가족의 가장이었다. 

  캣니스는 늘 준비되지 않은 채 생존게임에 던져졌다. 아버지를 잃은 그 순간부터, 삶은 그녀에게 어떤 언질과 어떤 평온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를 살린 것은 오직 아버지가 남긴 활과, 프림과, 피터와, 게일이었다. 그녀의 삶에서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들이 고작 그 네 개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캣니스 에버딘의 삶은 얼마나 큰 전쟁이었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훌륭한 언변가도, 정치가도, 대통령도 아니었다. 캣니스는 그저 주어진 삶에 충실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캣니스에게 자신이 바라는 만큼의 평온이 모두의 삶에 깃들기를 바랄 만큼의 인류애는 있었지만, 생존에 필요한 것보다 더 바라는 사람들을 이해해줄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캐피톨의 지나친 사치와 스노우가 벌이는 헝거게임이라는 피의 잔치, 그리고 코인이 갈구하는 반역과 권력이 그랬다. 캣니스는 그 모든 것이 허기와 숲 속의 고요와 사냥과 생존의 문제에 비하면 얼마나 가치 없고 무의미한 것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삶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캣니스는 단 한 순간도 바라는 대로 살지 못한다. 게일은 그녀의 친구로 남기에는 너무 많은 것-캣니스의 유일한 연인이 되는 것, 캐피톨이 전복되는 것, 자신들이 겪은 부당함을 그들이 모두 되돌려 받는 것,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 내는 것-을 바랐고, 어머니는 지나치게 유약해 스스로의 삶은커녕 딸들의 삶조차 챙기지 못했고, 한정된 자원과 풍요를 두고 벌이는 모두의 싸움은 캣니스에게 단 한 가지만을 원했다. 모킹제이. 우리의 상징, 혁명의 불꽃이 되어주는 것. 캣니스는 그 역할에 천재적인 능력을 보여줬지만, 그녀가 그것을 정말 원했을까?

 


 

  ...스노우와 코인이 없었다면 캣니스는 12구역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 내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헝거게임에서 캣니스는 끊임없이 승리한다. 캣니스 스스로 그 승리를 믿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지만, 그녀가 승자로서 수많은 이득을 누리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그 승리가 정말 캣니스의 것인가? 헤이미치가, 에피가, 피터가, 시나가 없었다면, 캣니스는 모킹제이는 커녕 살아남지도 못했을 텐데? 하지만 영화는 오직 캣니스만을 조명한다. 앞서 말한 모든 이들이 사라지자 단지 땋은 머리와 활만이 남는 한 무의미한 캐릭터를. (https://in-mybookshelf.tistory.com/76 [내가 사랑하는 것들])

 

  “영화 내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헝거게임에서 캣니스는 끊임없이 승리한다.”(영화 평에 내가 쓴 문장) 그랬다. 캣니스는 승리했다. 그러나 애초에 전제가 잘못되었다. 모든 게임은 캣니스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승리조차, 그녀에게는 득보다는 독이었다.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녀의 가족은 캣니스를 옭죄는 덫이 되고, 승리했기 때문에 그녀는 원치 않게 반군의 상징이 된다. 철저히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펼쳐지는 게임들 속에서, 캣니스는 언제나 하나의 장기말이었다. 그것도 가장 매력적이고 필요한. 그렇기에 더더욱, 캣니스 스스로의 삶과 감정은 모두의 관심 밖이었다. 캣니스는 행복할 필요가 없었다. 모두가 그녀를 필요로 했다. 그녀의 말 한 마디, 손짓 한 번에 전쟁의 판도가 바뀌었다. 다른 역할, 다른 삶은 없었다. 가령 그런 거였다. 네팔의 쿠마리 같은. 오로지 대중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져 세워진 신. 필요가 끝나면 가차없이 끌어내려지는.

 


  영화 속 평화로워보이는 엔딩 장면 속에서도 캣니스의 독백이 우리에게 슬픔과 불안함을 안겨주었던 것보다 더욱 심하게, 책의 엔딩은 끔찍하다. 우리는 거기에서 여전한 비통함을 본다.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이미 죽고 불타 없어졌다. 지독한 트라우마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의 안온함, 그때 느꼈던 사랑, 희망이 희망 그대로 존재하던 시절에서 유적처럼 남은 희망 비스무레한 조각들. 캣니스는 모든 게임이 끝나고도 여전히 게임 속에 살고 있다. 삶을 무너뜨리려는 그녀 안의 흉터와 트라우마는 그녀가 겪은 그 모든 적들을 합한 것 만큼 강력하다. 캣니스가 유일하게 바랐던 것들, 아버지와 프림과 함께 하는 소소한 삶은 불가능하고, 수백 명을 죽였다는 죄책감은 어쩌면 죽는 날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캣니스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헤이미치는 여전히 술을 마신다. 그들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삶이 비통하고 지옥같을지라도, 고개를 들면 하늘이 있고, 눈을 돌리면 숲이 있다. 우리 자신이 슬픔의 강에 잠겨 죽어가는 중에도, 햇살은 내리쬐며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에너지를 공급한다. 판엠이 캐피톨의 독재에, 구역들의 반란에, 수없이 많은 전쟁에 휘말릴 때에도, 캣니스의 숲은 그곳에 있었다. 12구역 끝의 잊혀진 울타리 뒤에.

 

  우리 모두의 고통은 그렇게나 하찮다. 마치 우주가 우리를 향해 코웃음을 치는 것 같다. 너희의 슬픔은 지구에게 영향을 미치기는커녕 인류의 역사를 비틀지조차 못한다고. 어떻게 보면 불행이지만, 어떻게 보면 행운이다. 우리를 죽일 만큼 강력한 고통도 실은 너무나 하찮은 것이라, 우리의 삶도, 저 숲도, 이 지구도 그런 것에 비틀리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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